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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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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 유종호 연세대특임교수
 


구체적 대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젊은이들이 외국문학을 접하는 것은 번역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근대소설과 근대극을 제외한 외국 고전은 사실은 운문으로 되어 있다. 누누이 강조한 대로 운문과 시는 번역을 통해서 그 대부분이 훼손되고 증발해 버린다. 남는 것은 앙상한 의미의 잔해일 뿐이다. 언어예술이기를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좋은 번역시는 수용어로 된 시와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창작 이상의 재주와 솜씨가 요구되는 뛰어난 번역시가 아니면 수용어의 뛰어난 시편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가령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돌아온 고향에서 <립 반 윙클>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귀향자의 감회는 어느 나라 시가에서나 되풀이 노래되는 원형적인 소재의 하나다. 외국의 어떠한 명시도 번역으로서는 가령 정지용의 <향수>나 <고향>과 경쟁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정지용의 <향수>와 <고향>이 노스탤지어와 귀향자의 감회를 노래한 최고의 명시인 것이다. 구체적인 경험을 위해서 고독이 주제가 되어 있는 우리 쪽의 백석과 윤동주, 그리고 서양 쪽의 릴케와 헤세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한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프랑시스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나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 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自畵像> 

  엄밀한 의미의 운문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근대시는 대체로 산문시적 성격이 강하다. 그 점을 참작하더라도 위에 적은 두 편은 서슴없는 산문시라 할 수 있다. 외국시 번역과의 비교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산문 지향의 시를 골라 본 것이다. 백석은 초기 작품에서 외국어나 진배 없을 정도의 지독한 서북방언을 통하여 독자적인 시적 모험을 감행하고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후기 작품에서는 그러나 방언 충동을 절제하면서 느낌을 술술 풀어가듯 대범해 보이는 호흡이 비교적 긴 산문시를 통해 사람살이의 근원적인 슬픔을 토로하고 있다. 무기교의 기교라고나 할 후기 몇몇 작품은 우리 근대시의 절창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데 위에 적은 작품도 그 중의 한편이다. 화자는 흰 바람벽이 있는 방안에 혼자 앉아서 떠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술회한다. 그것을 직접화법이 아닌 일종의 간접화법으로 극화한 데 묘미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축축한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 특장(特長)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는 대목에서는 섬뜩한 귀기(鬼氣)마저 감득케 한다. <사슴> 시절의 시적 모험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같은 절정에 이르는 도정의 우회적인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범해 보이는 이 작품이 사실은 무수한 시적 모험의 연마 끝에 도달한 최고의 순간을 울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이 작품은 물론 초기 작품의 이해도 원만한 것은 못되는 것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윤동주의 <자화상>을 단순한 고독의 시라 할 수는 없다. 한 젊은 영혼의 자의식과 자기 애증이 투명한 언어 속에 극화되어 있는 수도 높은 서정시편이다. 그러나 달 있는 밤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 제모습을 들여다 보곤 하는 청년의 애증이 심리극은 고독의 소산이다. 자화상은 그대로 고독한 자의 초상이다. 미움, 가엾음, 그리움과 같은 기층어휘가 이렇게 풍요한 함의를 갖게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외롭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자의 고독은 더욱 돋보이고 절실하게 감득된다. 스스로를 '한 사나이'로 객관화할 수 있는 서정적 상황구조는 절묘하다. 이제 우리는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시인의 작품 번역을 읽어볼 차례이다.

고독은 비와 같다.
고독은 바다에서 저녁을 향해 오른다.
고독은 아득히 외딴 평원에서
언제나 고독을 품고 있는 하늘로 향한다.
그러나 비로소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동틀 녘에 고독은 비가 되어 내린다.
모든 골목들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 것도 찾지 못한 몸뚱어리들이
실망과 슬픔에 서로를 놓아줄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흐른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독>(김재혁 역)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은 신기합니다.
숲마다 돌알마다 호젓합니다.
나무마다 다른 나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생활이 밝았을 때는
이 세상은 친구들이 가뜩 찼었습니다.
이제 안개가 내리니
한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어둠을 모르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어둠은 자기를 어찌할 도리 없이
모든 것에서 가만히 떼어 놉니다.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은 신기합니다.
인생은 고독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모릅니다.
모두가 호젓합니다.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정경석 역) 

  릴케의 작품은 중기의 시집인 <형상시집> 제1권 제2부에 수록되어 있는 시다. 적적하고 쓸쓸한 느낌이 비로 비유되어 바다와 평원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도시 위로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독이 비되어 내리는 도회의 뒷골목에서는 서로 환멸을 느낀 육체들이 떨어지기도 하고 피차 미워하면서 같은 잠자리에 들기도 한다. 이럴 때도 고독이 강물과 함께 계속 흐른다는 취지이다. 고독이나 쓸쓸함은 혼자 있을 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워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고독은 더 절실해지기도 한다. 제2연은 서정시치고는 극히 리얼리스틱한 관찰을 담고 있으며 제1연의 대자연의 적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헤세의 작품에서는 자연의 모든 것이 단독자이고 고독하다. 삶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안개속>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어둠이 모든 것을 떼어놓는다. 삶은 고독한 것이며 사람은 피차 남남일 뿐이다. 사람도 만물도 모두 혼자이다 . 이 사실의 수락이 지혜라고도 말한다.

  번역시를 통해서 우리는 작품의 취지를 대충 파악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 드러난 상황을 상상하면서 취지에 동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속 화자에 대한 짙은 공감 또는 감정이입에는 미지근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백석이나 윤동주의 작품을 대할 때의 감정이입과 비교해 본다면 차이가 뚜렷하다. 백석의 흰 바람벽을 지나가는 글자나 윤동주의 우물 속에 있는 사나이에게 우리는 의표를 찔리면서도 자연스러운 상황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화자에 대한 유보 없는 감정이입의 계기가 되어 주고 있다. 그러나 릴케의 고독과 비의 비유에 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또 헤세의 보다 친근한 비유에 무감하지는 않으나 깊은 감동을 받지는 못한다. 원시가 지니고 있는 울림과 미묘한 뉘앙스와 말의 음악의 태반이 증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번역이 서투르게 되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원시에 충실하면서 무리 없이 격을 유지하고 있는 번역인 것은 틀림이 없다. 다만 시 번역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고 서정시 특유의 느낌의 진정성은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석과 윤동주의 시를 외국어로 번역해 놓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번역 속에서 그래도 읽을 만한 시는 쉽게 요약될 수 있는 어떤 단편적 생각을 토로한 경우이다.

내 방 벽에는 일본의
악귀(惡鬼) 탈이 걸려 있다.
노랑칠을 한 것이다.
고약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마에 빠져나온 힘줄을
나는 알듯한 기분으로 바라다 본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의 탈> 

  인간이 저지르는 악은 때로 우리를 절망케 한다. 그러나 인간악도 사실은 어렵사리 이루어 지는 것이며 그만큼 선이 인간의 본성이며 자연이라고 브레히트 시는 말한다. 그러한 생각에 공명하든 안하든 작품의 취지는 분명하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문학적 경험이 된다. 필시 위의 작품은 번역을 통해서도 별반 잃은 것이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 울림이나 시적 자력(磁 力)은 약한 시라 해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외국시의 성취도를 수평적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웬만한 외국시의 번역은 우리 쪽 시와 경쟁이 되지 않으며 번역시만 읽고 외국시를 평가한다는 것은 특히 서정 시의 경우 만용에 근접하는 무모한 일이다. 릴케나 헤세라는 이름에 주눅이 들어서 번역 작품을 읽고 감동했다면 그것은 독자의 자유다. 그러나 그의 시적 감수성은 수상쩍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번역시는 읽을 가치와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번역을 통해서 시의 취지와 대의는 파악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은 윈시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총체성에서부터 떨어져 나온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시의 최 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를 통해서 독서경험을 쌓은 감수성만이 번역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독자들의 참고가 되도록 여기서 개인적 경험을 적어보려 한다. 필자는 중학 저학년 때 <햄릿>을 번역으로 읽은 일이 있다. 역자는 <제신의 분노>와 같은 개성적인 시집을 낸 시인 설정식이었다. 당시로서는 활자도 크고 체재도 의젓한 신간본을 빌려 읽었다. 그러나 감동을 받기는커녕 뭐가 좋은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세계 최고의 걸작이라는 해설이나 세계 최고 의 시인이라는 셰익스피어 소개에 고무되어 시작한 통독은 무너진 기대감과 자신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감되었다. 지지용을 비롯한 한국 근대시의 애송자였고 김동리의 <황토기>를 좋아했던 당시의 필자는 세계에서 공인된 최고 걸작에 무감동했던 자신에게 격렬한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찬찬히 재독하고 대충 줄거리는 알아차렸지만 훨씬 전에 읽은 모파상의<감람 나무밭>이나 토마스 하디의 <슬픈 기병>과 같은 단편집에서처럼 깊은 감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굉장히 재미있다는 같은 또래 책주인의 단언은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절망으로 바꾸어 주었다. 연천(年淺)한 인생경험이 <햄릿>의 향수를 불가능하게 한 국면도 있었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유명한 독백 장면을 주의 깊게 읽었지만 무감동이었던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의 위주의 번역이 원본과 엄청나게 다른 것이며 말의 음악이 소진된 것과 관련된 것일 터이다. '상처받은 사슴은 울러 가거라'란 노래만은 묘하게 잊혀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그 이미지에 끌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유명한 독백 장면에 무감동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은 대목에 끌린 것도 불안감 을 더해 주었지만 훨씬 뒷날 그 노래가 괜찮은 것이라는 확신감도 갖게 되었다. 개인적 경험을 얘기한 것은 비슷한 일을 겪고 불필요한 자학이나 자기회의에 빠질지도 모르는 독자들 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대의만 전달된 시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시에 비해서 산문소설 쪽은 번역을 통한 훼손도가 한결 적은 편이다. 그러나 이른바 예술소설 쪽으로 갈수록 그 문체가 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앞에서도 주목한 바 있다. 우리 나라 청소년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는 가령 펄벅의 <대지>,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샬로트 브론테의 <제인에어> 등은 책에 대한 흥미를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읽을 만한 것들이긴 하다.

  그러나 읽어 가면서 문체가 주는 독특한 매력을 감득하게 되지는 않는다. 이런 작품을 계기로 해서 보다 밀도 있는 명작을 읽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계속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정작 읽을 만한 작품은 제쳐 두는 셈이 된다. 비록 번역을 통해서라도 명작소설의 문체는 얼마쯤 전달되기 마련이고 거기 끌리게 된다면 파란 많은 줄거리 위주의 소설에는 곧 물리게 될 것이다. 문학 고전이 발휘하는 힘의 하나는 신통치 않은 대중소설을 멀리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좋은 영화의 관람이 졸렬한 영화의 관람을 지루하게 답답하게 만들어 주는 것과 같다. 어쨌든 우리 시를 통해서 말과 글에 대한 문리(文理)가 트이게 되면 명작과 대중소설의 차이도 한결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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