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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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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환상과 광기의 서사구조









월드컵, 환상과 광기의 서사구조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듣기 위해 숲의 모든 동물들이 사이좋게 한 자리에 모이고 강물은 물길을 바꾸고 산도 방향을 틀었다는 것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이야기다. 한국의 16강 진출이 좌절되던 6월24일 그 ‘돌연한 죽음’의 순간까지, 대다수 한국인에게 월드컵은 그 이상의 신화였다고 말할 만하다. 2006년 6월의 한국을 지켜본 신화작가가 있다면 그는 일기에다 이렇게 써넣지 않았을까? “한국 사람들에게 월드컵 축구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 은하계를 다 뒤져도 없다. 서울을 보라. 시청 광장에 붉은색 함성이 터지는 날이면 한강은 흐르던 물길을 멈추고 남산 북악산도 광장 쪽으로 돌아앉는다. 늑대와 새끼양이 함께 춤추고 호랑이, 토끼, 사자가 어깨동무하고 빚쟁이는 히히 웃고 놀부가 술을 돌리고 여당 야당이 한 마당이다. 낙원이 따로 없었다.”


물론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월드컵에 출전한 나라의 백성들 치고 자기네 대표 팀의 전적에 일희일비하며 반쯤 미치지 않은 부족이 없다. 4년에 한 번 사람들에게 미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월드컵은 세계적 규모로 되살아난 현대판 디오니소스 축제다. 그 어떤 신의 이름도, 그 어떤 축제, 그 어떤 구호도 사람들의 가슴을 열게 하기에는 역부족인 시대에 월드컵은 마치 대통합의 신처럼 모든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춤추게 한다. 바벨탑을 세우다가 싸우고 제 각각 다른 방언을 쓰며 흩어졌던 부족들이 축구라는 하나의 언어 앞에서는 다 모인다. 감격할 일이 별로 없고 가슴이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에는 사람들을 미치게 할 일이 하나쯤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구원일지 모른다.


그 구원의 비밀 하나를 우리는 안다. 이름 없었던 자가 그 무명성에서 탈출하고 미미했던 자가 그 존재의 범상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그 비밀의 한 자락이다. 월드컵에 나올 때까지 토고라는 나라는 세계무대에 널리 알려진 존재가 아니다. 월드컵에서 만나기 전 아프리카의 이 작은 나라를 알고 있었던 한국인은 많지 않다. 빈곤국 가나가 초강대국 미국을 꺾는다는 것은 월드컵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가나 사람들의 용서를 빌고 말한다면, 생쥐가 코끼리를 때려누이고 당나귀를 무릎 꿇리는 것 같은 환상적 사건이다. 그런데 월드컵에서는 그 판타지가 가능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작고 이름 없는 존재가 어느 날 크고 힘센 골리앗들을 차례로 무너뜨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것은 사실은 가장 오래된, 그리고 유구한 세월동안 사람들을 즐겁게 해온 이야기 구조의 하나다. 엄지동자가 거인을 이기고 토끼가 여우를 골탕 먹이고 새끼양이 늑대를 눕히는 이야기는 인간이 ‘이야기’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한 번도 그 위력을 잃은 일이 없는 기본 서사구조이고 모든 대중문화의 골간 플롯이다. 월드컵은 그런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은 엄지동자가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는 V자 상승의 구조, 모든 약자가 자기 존재의 무명성, 미약성, 범상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웅의 크기를 획득하는 서사구조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 구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기본적으로 약자이고 엄지동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존재의 상승, 해방, 확장을 경험하게 하는 이야기처럼 신명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2006년 6월의 월드컵을 맞고 보낸 방식에 대해서는 반성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월드컵으로 도배질을 한 방송의 싹쓸이 편성, 신문들의 호들갑과 터무니없는 과장보도, 기업들의 파렴치한 장사속과 자본의 개입, 보도 뉴스의 80% 가량을 차지한 과잉공급, 이런 일들은 ‘문화연대’ 사람들이 지적하듯 ‘세상을 마취와 망각으로 몰아넣고’ ‘많은 문제들을 은폐’한 미디어의 광기이자 사회적 이성의 실패다. 언론에 축제란 것은 없다. 언론은 어떤 경우에도 공공성을 희생할 수 없고 사회적 이성의 사용을 포기하거나 국민생활에 제기되는 중요한 도전들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 언론의 제시 방식에 따르면 유월 한 달의 대한민국은 월드컵 말고는 다른 어떤 중요한 것도 존재하지 않은 나라 같다. 그 나라는 아무리 봐도 자랑할 만한 ‘대에한민국’이 아니다.


가장 우려할만한 사태는 전 국민을 과도한 ‘대한민국주의’의 물결 속으로 몰아넣은 기이한 애국주의 열풍이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를 비롯해서 도심 거대 건물의 광고판 밑에 어김없이 내걸렸던 것이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현수막이다. 그 공허하고 애처로운 구호들은 지금도 남아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나라사랑이 정도를 지나치면 광기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의 애국이 나라사랑의 길이기는 정신적 질병의 한 징후이자 사람들을 ‘아이 시절’로 퇴행하게 하는 ‘유아화’ 현상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월드컵을 즐기고 우리 대표 팀의 분전에 갈채를 보내는 일과 월드컵에 모든 정서 에너지를 ‘올인’으로 쏟아 부어 오로지 ‘대에한민국’을 외쳐야 애국이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4년 전 이맘때, 우연히 시청 앞을 지나가던 대학원생 K는 흥분한 목소리로 붉은 물결의 응원풍경을 취재하던 한 텔레비전 방송의 길거리 인터뷰에 걸린 일이 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이기겠죠?”라는 기자 질문에 K는 “난 월드컵 같은 거 관심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다가 혼쭐이 난다. 기자가 갑자기 시뻘게진 얼굴로 ”야, 너 대한민국 국민 아니지?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며 된통 힐난하고 달려든 것이다. 졸지에 민족반역자 대열에 낄 뻔한 K는 엇 뜨거, 축구 대표 팀 미드필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줄행랑쳤다고 한다. 2002년 여름의 이 삽화는 가감 없이 2006년 유월의 얘기이기도 하다. 농경공동체 붕괴 이후 축제다운 축제가 없는 나라에서, 게다가 천갈래만갈래의 이해관계로 찢어진 사람들이 그나마 축구에서 정체성의 공통 언어를 발견하는 한 순간을 갖는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대에한민국’을 한 목소리로 외치지 않는 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고 ‘오 필승 코리아’를 연호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에 이르면 문제는 심각하다. 2006년 유월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안긴 한 달이기도 하다.


- 도정일 /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출처 : 한겨레
날짜 : 2006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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