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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백승호 
Subject  
   2005 수능대비 비문학 과학1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의 과학기술

학습목표
1. 첨성대에 관한 논란을 통해 신라시대의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이해할 수 있다.
2. 삼국시대의 주조기술을 이해할 수 있다.
3. 삼국이 일본의 과학기술의 문화발전에 미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다.
4. 다라니경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인쇄술의 발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1. 첫 번째 이야기-첨성대는 제단이었나

가. 역사 속의 첨성대 - 첨성대에 대한 이상한 기록들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우리의 과학 유산으로는 첨성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첨성대는 동양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천문대 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용범교수가 첨성대는 당시 신라인들의 제단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들고 나왔다. 그 뒤로 '첨성대-천문대인가, 제단인가?' 라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었다.
천문대가 관측대였다면 왜 그리도 작게, 그리고 올라가는 방법도 분명하지 않게 만들었냐는 의문도 남는다. 이런 의문은 문헌상의 기록에 대한 의문들로 이어졌다.『삼국사기』는 이 첨성대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삼국유사』에는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아주 간단하게나마 남아있다. 또『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주를 소개하면서 기록하고 있고, 천문을 관찰한다는 설명으로『동국여지승람』에도 남아 있다.『고려사』지리지에는 간단히 경주에 선덕여왕이 만든 첨성대가 있다고만 적혀있다. 그리고『동국여지승람』에 첨성대 관련글로 안축, 정몽주, 조의가 남긴 시들이 있다. 그러나 그 시들은 과학적 자료가 될만한 내용은 전혀 없다. 첨성대가 과연 천문관측을 위한 것이었는지조차 다시 생각해보는 분위기가 생겼다.

나. 첨성대에 대한 여러 해석들
첨성대가 과연 어떤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놓고 학자들의 의견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과학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것은 천문학이다. 첨성대가 그 대표적 유물이다. 첨성대를 글자 그대로 '별을 쳐다보는 대' 란 뜻으로 해석한다면 말이다.
그런가 하면 첨성대는 천문대이기보다는 해시계로서의 의미가 더 강할 것이라는 '규표설'로 해석되 제시된 일이 있고, 지자기의 편각현상을 나타내려고 세운 건조물이라는 주장도 있고, 그중 가장 파장을 일으켰던 학설이 이용범 교수의 '수미산설'이였다. 이교수는 첨성대는 불교 영산의 모양을 본떠 세워진 일종의 제단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신라 사람들은 입추후의 첫 진일에는 영성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영성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사람들은 왜 영성단 자리에 첨성대를 지었을까?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중국 사람들을 따라 영성에 대해 제사를 지내기는 했지만, 점점 그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첨성대는 말하자면 신라의 천문 관측소가 자리잡았던 위치에 유일하게 남아 있게 된 유물이 아닐까. 718년에 만든 것으로 기록된 누각전이라는 천문관청은 바로 그 부근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다. 첨성대와 삼국의 천문학사
첨성대는 천문관측을 위해 아무것도 배려하지 않은 듯한 불편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첨성대가 순전히 천문관측을 위한 것이였다면 왜 김부식이 그런 기구의 존재를 가무려 했던것인가 하는 것도 의심스런 대목이다. 『삼국사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것이 가진 불교와의 관련 내지는 민속신앙적인 요소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김부식은 불교와 민속적인 요소를 가능한 한 제외한 역사를 썻고, 일연은 그렇게 삭제된 부분을 되살리는 역사를 쓴 것이다.
첨성대 일대에 세웠던 천문 기관에는 여러 명의 천문관계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라의 천문박사 1명, 역박사 0명, 누각박사 6명, 음양박사 0명. 신라는 중국을 본떠서 이런 기구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에는 유난히 누각박사만 많고, 역박사와 음양박사는 한명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라. 삼국의 천문 기록 - 일식은 누구의 것이었나
1926년 일본의 천문학사 학자인 반도충부는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기록된 일식은 모두 중국 것을 베껴 넣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썼다. 삼국 시대의 역사를 쓰던 김부식은 자료가 워낙 부고하기 때문에 중국 사료를 많이 베껴 넣게 되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한국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식을 중국 역사 기록을 보고 그대로 베껴 넣어서 삼국시대의 역사를 더 풍부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당나라와의 외교관계 등은 중국 사료에 의존하여 그것을『삼국사기』에 옮겨 썼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김부식이 외교관계를 베꼈듯 일식 기록도 옮겨 놓았을 것이라는 반도의 주장에 김부식은 부도덕한 역사가쯤으로 치부되는 치욕을 겪었다.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은 중국의 것과 같을까? 그 이유는 김부시이 중국 기록을 참조하여 우리 기록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는 불확실한 기록과 일식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들을 가지고 동시대의 중국 사료를 찾아 정확한 일식의 날짜를 확인했을 수 있다. 김부식은 중국 기록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중국 기록을 참고하여 삼국의 기록들 중 불확실한 날짜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중국에서 관측된 일식이나 혜성 등은 거의 그대로 한국에서도 관측된다. 그런 경우 두 나라의 기록이 같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홍수, 가뭄을 비롯해 용이 나타난 것까지 수많은 자연 현상인 기록들은 중국 것을 베낀 것일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2. 두 번째 이야기-쇠와 돌을 다루던 사람들, 그 과학의 깊이

가. 황룡사종과 에밀레종
▷ 에밀레종
* 정식 이름은 '성덕대왕신종'이며 구보 제 29호로 지정되어있다
* 높이 333㎝, 종의 아래 지름이 227㎝나 되어 남아있는 종 중에 제일 큼
▷ 황룡사종
* 고려 때 몽고군이 약탈해 가다 동해바다에 빠뜨렸다는 설이 있어 탐색 중
* 높이 1장 3척, 무게 약 50만근나 되어 남아 있었다면 당시 세계 최대의 종
▷ 중국, 일본과 달리 한 마리의 용으로 장식하고 있다
▷ 한국의 종만이 옆에 원통모양의 음통이 달려있음

나. 철지도의 금속기술
▷ 날이 일곱 개 달린 칼이라는 모양세에서 유래
▷ 백제에서 만든 의식용의 칼로 일본 천리시의 석상신궁에 보관 중
▷ 양쪽으로 번갈아 3개씩 양쪽 모두 6개와 가운데 속아있는 한 개의 칼날으로 7개
▷ 당시 백제의 제철기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줌
▷ 금속 기술의 발달은 결국 인쇄기술과 합쳐져 고려 때 금속활자로 발전 됨
▷ 현재 국립 부여박물관에 원형과 똑같은 모조품이 전시되어있음

다. 토목 건축의 기술
▷ 일본에 백제 기술을 전달하여 일본 역시도 불교 건조물의 황금시대를 맞에하게 함
▷ 실제 당시 백제의 토목기술이 가장 발달해 있었음
▷ 불국사 신라의 김대성이 751년 건설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짐
▷ 다보탐과 석가탑 백제의 아사달이 만든 것으로 전해짐
▷ 황룡사 9층탑 역시 백제의 아비지가 만듦
▷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약80㎝나 되고 상륜부가 15m이며 탑신이 65m였다
▷ 아홉 개의 층은 각가 일본, 중화, 말갈, 예맥,등 이웃 나라를 보속시키려는 바람
▷ 1238년 몽고 침입깨 불에 타서 황룡사 전체가 탑과 합께 타버렸다
▷ 황룡사에는 종이 있었는데 거의 50만 근이나 되는 거대한 종이있었다
▷ 전북 익산의 미륵사터 발굴은 백제의 사원 건축의 기술과 규모를 엿볼 수 있음
▷ 원래 9층 탑인 것으로 추정되고 그 높이는 20m나 외었다고 추측됨
▷ 목탑 모양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는 불국사의 다보탑을 연상하게 함
▷ 인공으로 높이 한길 이상의 작은 산을 만들고 온갖 결치를 나타낸 이 자동장치는 불상이 많다 하여 만불산이란 이름도 얻었다.
▷ 한국기술사에서 자동장치의 첫 케이스가 된다는 것이다
▷ 만불산 보다 7백년 전 이미 자동장치로서 종을 울리고 불경 소리까지 내게 하면서 승려들이 절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일임
▷ 토목기술의 예로는 안압지를 들 수 있다
▷ 이 연못은 647년에 완성되었고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짐
▷ 무산 12봉을 본떠서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고 기록 됨
▷ 석굴암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으로 널리 인정되어 있음
▷ 석굴음은 수학적 가치에 대해 아주 높은 평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 석굴암은 지름 7.15m의 원형 바탕 위에 돔 모양으로 축조 됨
▷ 석굴암은 기하학적인 지식이 총 동원된 듯한 모양임
▷ 원형과 구형이 잘 조화되어 있고 원형 내부의 육각형의 한 변늘 나타낸다
▷ 정삼각형의 꼭지점에는 부처님상을 받쳐놓은 정팔각형 모양의 대좌가 닿게 되어있음
▷ 774년 김대성이 죽자 이 시기에 신라는 당나라의 수학체제를 받아들여 산학박사를 둠
▷ 수학 교육에는 『철경』, 『삼개』, 『구장』, 『육장』등의 교재를 사용함
▷ 당시 우리 수학 수준이 상당히 놓았을 것이라고 짐작함



다라니경은 누구의 것인가

가.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 - 다라니경
(1)'다라니경'
①세계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자 한국의 국보이다.
②정식 이름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며, 이 불경은 1996년 10월 석가탑에서 발견되었다.
③다라니경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술은 770년경에 제작된 일본 불경이었는데, 우리의 '다라니경'은 그 제작 시기보다 60년은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④ 이 불경을 인쇄한 것은 늦어도 705년 전후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된다.
(2)중국의 주장
①측천무후라는 특이한 한자가 들어 있다는 이 사실 때문에 중국학자들은 신라의 인쇄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3)우리의 주장
①신라에서는 695년에 역법을 측천무후의 것으로 바꿨다가 700년에 다시 옛 방법으로 바꾼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라니경에 충분히 도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
②다라니경이 출토된 곳은 중국이 아닌 한국이다.
③세 번째이유는 다라니경의 종이가 신라 종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

나.목판 인쇄술의 결정체 '팔만대장경'
(1)팔만대장경
① 고려의 한문으로 되어 있는 불경이란 불경은 모두 수집하여 목판에 찍은 것이바로 이 대장경이 되는 셈이다.
② 236년 고려 왕실은 대장도감을 세워 대장경 새기는 작업을 하여 16년 뒤인 1 251년에 완성
③ 1한 8만1258매의 경판은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보 제 111호로 지정
④ 대장경판 한 장의 크기는 가로 72.6cm, 세로 26.4cm, 두께 3cm이고 양끝에는 나무조각을 붙이고 귀퉁이에는 구리장식을 달았으며, 글자는 대개 23줄로 각 줄마다 14자씩 되어있고 원래 대장경은 선원사에 보관되다가 1398년쯤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다. 금속활자의 발명
(1)금속활자
①처음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고종 21년으로 밝혀져 있다.
②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는 고려 때 인쇄된 직지심경이 꼽힌다.
1) 직지심경
이 책은 원래 우왕 3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 체요절 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 책은 쿠랑이 지은 책 '한국서지'에 기록되어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으나,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던 것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1972년 세계 도서의 해를 맞아 출품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라. 계속 이어지는 활판 인쇄술의 맥
우리 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달은 세계적으로 인정되었다.
예)미국의 역사학자 부어스틴이 그의 책 '발견자들'에서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인쇄국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1) 중국의 태도
중국의 과학사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금속활자의 발명을 완전 무시하려는 태도며 금속활자 이외의 다른 활자는 모두 중국에서 먼저 발명되었음을 강조한다.

마. 인쇄술과 인류의 역사
(1)인쇄술
① 삼국 시대에 이미 목판 인쇄가 발달하기 시작, 고려 말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인쇄술이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2) 인류의 역사
① 조선시대의 문화 창달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것으로는 평가하기 어렵다.
㉠ 당시 사용했던 글자는 한글이 아니라 한자였는데 글자가 너무 많이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우리 나라 인쇄술이 가진 원래의 목적은 꼭 널리 책을 보급하려는 것보다 중요한 문서와 자료를 정성들여 오래 보관하겠다는 데 있었다는 점
② 서양에서 알파벳은 활자로 다루기 쉽고 배우기도 쉬워서 책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고, 기름 짜던 장치를 활용해서 만들어낸 활판 압착 장치 덕택에 한번에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게 되었으므로 지식층을 급격히 증가시켜 종교 개혁의 바탕을 제공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할 수 있지만 고려 말에는 인쇄술 때문에 지식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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